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시인이자 비평가 고석규는 1958년 스물여섯 살에 요절함으로써 한국 평단에서는 잊힌 존재가 되었다. 1990년 유고 평론집 ≪여백의 존재성≫(지평, 1990)이 발간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유고집 발간 이후 김윤식 교수를 필두로 고석규 비평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한 인간으로서 고석규는 일찍 사라졌지만, 1950년대 비평사에서 평론가 고석규는 언제나 살아 있는 존재로 부각된다.
고석규의 문학 활동 기간을 시와 산문이 보이는 1952년 이후로 잡는다면, 1958년까지는 육칠 년에 해당되는 짧은 시간이다. 그에 비해 그가 남겨 놓은 글들은 쉽게 건너뛰기 힘든 무게를 지니고 있기에, 1950년대 한국 비평사를 다룰 때는 간과할 수 없는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책에는 고석규 비평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여백의 존재성>, 그의 실존 사상이 구체화한 <지평선의 전달>, 시의 본질에 접근한 <현대시와 비유>, 개성적인 시론을 바탕으로 이육사·윤동주·김소월·이상을 다룬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 <시인의 역설>을 담았다.
‘L에게’라는 편지글 형식을 차용한 <여백의 존재성>은 릴케의 예술론에 다가서려는 힘든 몸짓을 보여 준다. 릴케의 ‘소리 없는 소리’와 발레리의 ‘아름다움의 이데에는 아름다움이 존재치 않는다’는 역설을 여백의 존재성을 통해 풀어내려고 했다. 릴케에게서 상징된 미의 창조로서의 여백은 고석규에게 와서는 실존적 차원의 부재를 통한 존재와 확인 혹은 증명으로 나아온다.
<지평선의 전달>은 소월 시를 논하기 위해 마련한 서론 격에 해당하는 평문이다. 나의 현재의 실존을 과거와 미래를 연결 짓는 중간 선상에 놓음으로써 자신의 지평을 어떻게 열어 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는 던져진 수동의 삶에서 던져 가는 능동의 삶으로 바꾸어 가고자 하는 삶의 자세다. 그래야만 실존적 불안을 떨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통해 죽음을 체험한 고석규에게 전쟁은 존재를 무화하는 현실적 상황이다. 이러한 실존적 상황 속에서 자기 존재성을 여백의 존재성으로 확인한 그는 여백과 부재성을 넘어설 사유의 방향성을 실존주의에서 찾는 것이다. 그 방향성의 하나가 실존적 상황을 여백의 존재성이란 역설로 받아들이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실존의 기투적 성격이다. 이러한 역설성과 기투성이 함께 어우러져 만든 실제 비평이 이육사·윤동주·김소월·이상을 다룬 <시인의 역설>이다.
고석규는 실존주의적 비평만 선보인 것은 아니다. 그는 시의 본질적인 문제에도 집착하면서, 시의 본질이나 원론에도 접근한 모습을 보인다. 그 대표 평문이 <현대시와 비유>다. 이 글은 시에서 비유란 무엇인지를 사전적 의미에서부터 대상을 새로운 상태로 놓기 위한 의미 작용이란 차원까지 정리하고는, 한국 현대시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비유의 양상을 검토하고 있다.
200자평
1958년 26세에 문단에서 사라졌던 평론가 고석규. 1990년 유고 평론집이 발간되자 평론가들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체험에서 비롯한 실존 사상에 바탕을 둔 개성적인 비평문으로 평론가 고석규는 부활했다.
지은이
고석규(高錫圭, 1932~1958)는 1932년 9월 7일 함남에서 고원식(高元植)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956년 3월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1958년 3월에 수료하고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가 되었다.
대학 재학 시 손경하, 하연승, 김일곤, 홍기종, 장관진 등과 함께 동인 활동을 활발히 하여 ≪신작품≫, ≪시조≫, ≪시 연구≫, ≪부산 문학≫ 등을 펴냈다. 1957년에는 김재섭과 함께 2인 공저 ≪초극≫을 간행하였고, 그해 ≪문학예술≫에 평론 <시인의 역설>을 6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58년 4월 19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2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가 남긴 유고 <시적 상상력>은 ≪현대문학≫에 연재되었고, 유고 평론집 ≪여백의 존재성≫이 1990년에 선을 보였으며, ≪고석규 유고 전집≫(5권)이 1993년과 2012년에 각각 발간되었다.
엮은이
남송우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평단에 나왔으며, 평론집 ≪비평의 자리 만들기≫, ≪지금 이곳의 비평≫ 등이 있으며, 현재는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다.
차례
여백의 존재성
지평선의 전달
현대시와 비유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
시인의 역설
해설
고석규는
엮은이 남송우는
책속으로
나는 나의 여백을 한동안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절박한 시간을 극복하는 나의 안정이라 할 것 같으면 나는 나의 불투명한 여백과 부재의 사고에서 새로운 투명과 새로운 존재를 다시 발견할 것이 아닙니까.
―<여백의 존재성>
현대란 시의 메타포아 속에 압축되며 존재가 메타몰포오즈하는 전장이며, 다시 정신의 메타피직한 초월의 시대라는 것을 어찌 부인할까.
‘상상’과 ‘의미’와 ‘상상’과 그리고 또 ‘신화’의 곁에서 비유는 실존의 기를 세우는 언어의 재건이 되라. 눈감은 ‘방법의 직인’이여! 다시 ‘비유의 직인’이여! 꽃이며 나무며 인정이며 하는 전율의 살창에서 시방 그대의 소리 없는 울음을 느껴라. 그러나 “그것은 정신일 것이다.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정신일 것이다. 우리가 타일러도 묵묵하는, 아니 들리는 것이란 벌써 인간의 말소리가 아니다. 그는 우리들의 종이 아니라 주인일 것이다”.
―<현대시와 비유>